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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의점 문 앞 핑크색 가방
    AROUND ME/My Thoughts 2006. 3. 23. 11:47
    출근하기 전에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사려고 편의점에 들렀는데, 가게 문 앞에 분홍색 스케치북 가방이 하나 딱 '널부러져' 있었다. 날긋날긋한거 보니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은 아닌거 같고... 누가 문 옆에 기대어 놓았던건데 쓰러진 듯. 다시 세워놓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는 예닐곱살쯤 되어보이는 잘생긴 남자아이 하나가 초코바를 사고 있었다. 캔커피를 사고 밖으로 나오니 꼬마는 그 분홍 가방을 옆으로 매고 있었다. 다시 옆으로 매기에도 불편한 가방을 뭐하러 편의점 문 앞에 기대어 놓았던걸까? 결국 꼬마에게 물었다.


    "그거 왜 가게 앞에 놓고 들어간거야? 누가 가져가면 어떡하려고?"

    "분홍색이어서 부끄러워요. 여자애들 색이라서"


    길거리에서 매고 다닐땐 어쩌나? 편의점 아르바이트 아가씨에게 특별히 남자답게 보이고 싶었던걸까? 머리에서 작은 궁금함이 덩달아 떠올랐지만 총총걸음으로 가는 바쁜 새싹을 붙잡고 물어보기엔 좀 뭐했다. 자기 키 반만한 스케치북 가방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꼬마를 보니 갑자기 내 예전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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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들어갈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엄마/아빠와 커뮤니케이션상의 문제로 새 가방의 컬러가 '주황색'으로 낙점되었다.

    '주황색..' 상당히 애매한 컬러였다. 그 당시 기준으로 봤을때 핑크처럼 여성스럽지도 않고, 남색처럼 남자 아이들 컬러도 아니고... 약간 중성스럽다고나 할까?

    나는 이런 애매모호한 분위기에 확연한 의미를 각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티커 붙이기'를 선택했었다. 태권브이, 마루치 아라치, 황금날개.. '남자아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만화영화의 캐릭터 스티커를 가방 위에 덕지덕지 붙였던 것이다. 이것으로 애매모호한 컬러가 갖고있는 중성성이 남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천으로 만들어진 가방에 허접한 스티커는 잘 붙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서 그만뒀으면 되었을 것을... 나의 짧은 판단력은 고육책으로 '스티커 뒤에 뽄드를 발라서 가방에 확실하게 고정시키기'라는 엄청난 작업까지 강행하게 만들었다.

    누구하나 말려주는 사람 있었으면 좋았건만, 어머니나 아버지는 (지금도 그러신 것처럼) '지 멋에 사는 게지'라는 생각으로 방관하셨다. 여차저차 붙은 스티커는 처음 며칠동안은 가방 위에서 나의 남성성을 확실하게 만방에 고했지만 (혹은 고했다고 나를 착각하게 만들었지만), 먼지 바람에 몇차례 뒹굴면서 슬쩍슬쩍 찢어지기 시작했다. 문방구 출신의 싸구려 종이 스티커들이 뭐 내구성이 있었겠는가.

    결국 가방에 '장착'된지 단 며칠도 안되어서 종이 스티커들은 모두 사라졌다. 게다가 상흔도 남았다. 작업에 쓰인 본드가 그 유명한 '누런 돼지표 본드'였기 때문에 스티커의 아우트라인 그대로 누우런 본드 자국이 가방위에 지저분하게 남았던 것이다. 물론 주황색 가방이라 자국이 아주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모든 아이들이 오매불망하며 갖게되는 첫 책가방의 상판을, 나는 단 일주일만에 넝마로 만들어 버렸다.




    무언가 불분명하거나 희미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는 정말 뚜렷한, 눈에 띌 수 있는 무언가를 내세우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면.. 그리고 진실이 없는 허울만의 모습을 그냥 표면에 '고착시키려고' 한다면 그 허약한 외피는 모래위의 집처럼 쉽게 사라지고마는게 아닐런지. 종이스티커 뒤에 바른 돼지표 본드처럼 '잘 안 지워지는' 자국까지 남기면서 말이다.

    그래... 조금만 더 머리가 컸더라면, 주황색 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해도 그냥 내 입으로 '난 남자야!'라고 외쳤을 지도 모르지. 그게 더 나은 방법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어도...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주황색 가방위의 본드자국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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