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이다)
- 한현우 조선일보 기자의 블로그 글 발췌
가방에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넣고 다니며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때만 해도 아이팟은 국내에서 ‘신기하고 팬시한 물건’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128메가바이트의 손가락 만한 MP3 플레이어가 훨씬 더 많던 시절이다.
나는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내 CD 플레이어의 리모콘 만한 MP3를 손가락 끝으로 틱틱 조작하는 사이, 내 가방 속의 CD 플레이어를 꺼내 뚜껑을 열고 하이럼 불럭의 CD를 빼내 케이스에 넣은 뒤 다시 닐 자자 CD의 케이스를 열어 알맹이를 플레이어에 넣고 다시 가방 속에 넣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동작은 많은 사람들을 어이없게 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저 미련하고 원시적인 짓을 아직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눈길들이 내 CD 플레이어와 얼굴에 번갈아 와서 꽂히곤 했다. 그 눈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제 철 들 나이도 지나 보이고, 음악을 하는 사람같지도 않은데”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아직도 CD를 산다. 예전에는 남에게도 CD를 사라고 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CD는 음악산업의 십계명도 구명보트도 아니다. 다만 음악을 담는 도구일 뿐이다. CD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LP처럼 컬렉터 용으로 시장에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CD를 사야 음악계가 살아난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안타깝게도, 더 이상 없다.
나는 LP 세대가 아니다. LP가 음반 형태의 주류이던 시절에 음악을 가장 많이 들었으나, 기껏해야 참고서 살 돈이나 학원 수업료를 삥땅쳐야 음반을 살 수 있던 중고교 시절에 LP는 내게 너무 비쌌다. 그래서 나는 테이프세대다. 거의 모든 음악을 카세트테이프로 들었고, 황학동이나 세운상가에서 구한 해적판 LP는 모두 테이프에 녹음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밤 늦게까지 음악을 듣기엔 아버지가 너무 엄하셨고, 거실에 놓인 턴테이블 앞에서는 아버지의 눈을 속이기 너무 어려웠다. 나는 수많은 카세트테이프 컬렉션들과 함께 내 방으로 숨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CD 컬렉션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 달간 일하면 받는 돈에서 CD 값은 크게 무리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 중고 CD를 파는 인터넷사이트나 가게들을 알게 되면서 점점 CD에 쓰는 돈이 불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10장씩 CD를 사갖고 집에 가면 아내는 “중고 CD만 파는 데도 있어?” 하며 호기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라면상자만한 박스에 CD가 배송돼 오던 날, 아내의 호기(好奇)는 살기(殺氣)로 바뀌었다.
반성은 없었다. 일본에 출장 갔다가 도쿄 시부야에 있는 6층짜리 중고 CD 판매점에 가서 한번에 100만원 넘는 돈을 지르기도 했다. 미친 짓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과거에 테이프로만 듣던 밴드의 음악들이 CD로 꽂혀있는 랙 앞에서 지름신 강림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진정 음악애호가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크림과 제프 벡, 블랙 사바스와 예스의 옛 CD들 앞에서 나는 즐겁게 무기력했다.
그렇게 모으고 또는 얻은 CD가 이제 방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부엌 찬장에도 들어가고 방 여기저기에 수북이 쌓이게 됐다. 급기야 이미 샀던 CD를 없는 줄 알고 또 사는 정신분열형 CD 컬렉터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회사에 배달돼 온 CD들을 새로 나온 프라모델 포장을 뜯는 초등학생 같은 표정으로 열어보고 있는 나에게 회사 선배가 한 마디 했다. “야, 아직도 CD 사는 사람이 있구나.”
나는 우울하거나 무료할 때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CD들 앞에 선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내 새끼들을 한번 훑어본 다음, 한 발짝 다가가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 중 하나를 고르는 의식을 치른다. 오늘 밤엔 어느 후궁에 들까 궁리하는 임금처럼, 서른 한 가지 중 어떤 것을 먹어볼까 하는 배스킨라빈스 매니아처럼. 이윽고 한 장을 골라 케이스의 먼지를 쓱 닦아내고 CD를 꺼내 플레이어에 건다. 그리고는 속지를 꺼내 들고 멀찌감치 앉는다. 음악이 나오면 나는, 밤 늦게 헤드폰을 끼고 카세트테이프로 딥 퍼플을 듣던 중학생으로 돌아간다. 해적판 LP를 테이프에 녹음해 제스로 툴에 미쳐 지내던 고등학생이 된다.
그렇기에 나는 CD를 산다. 추억을 사서 모으고 풋내기 시절 열정을 수집하는 것이다. 비록 CD에 담긴 것은 디지털 음원이지만, 얇고 네모난 플라스틱 케이스라는 실물이 꽂혀있는 아날로그, 그것들을 눈으로 보듬고 손으로 쓰다듬어 오디오에 걸어넣는 수작업을 사랑한다. MP3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끝끝내 나를 제압하지 못하는 이유다.
*이 글은 음악저널 <밴드 앤 뮤직> 지난 1월 22일자에 기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