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딱 잘라 말해 천재 음악가인 한스 짐머. 80년대 후반부터 빛을 발하던 그였지만 최근에는 다소 자기복제가 심한 테마를 만드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스펙타클한 영화들의 스코어를 후배 영화 음악가들과 공동작업 하면서 이런 침체를 타개하려고 애썼다. 닉 글레니 스미스와 작업했던 [더 록]의 사운드트랙이 아마 그 대표적인 예일듯.
그리고 2005년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인 [배트맨 비긴즈]의 사운드 트랙에서 그는 동료인 제임스 뉴튼 하워드와 함께 이 훌륭한 역작의 마름질을 잘 해냈다.
까마득한 후배 영화 음악가가 아닌 - 영화 음악계에서 경력으로는 거의 동급인 제임스 뉴튼 하워드와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배트맨 비긴즈]의 사운드 트랙은 '이미'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뉴튼 하워드의 최근 작업중 발군은 역시 모호하게 분위기를 가중시키는 서스펜스 음악들인데 (M 나이트 샤말란 영화들의 전담 작곡가이기도 하다.) 멜로딕한 한스 짐머의 기본틀에 뉴튼 하워드의 분위기에 맞는 편곡의 결합이 아주 잘 이뤄졌다.
영화음악이 영화의 내용에 영향을 받는 것은 인지상정. 그런면에서 감정의 고저가 다양한 [배트맨 비긴즈]의 사운드 트랙은 [스타워즈]나 [타이타닉] 못지 않은 스케일로 펼쳐진다.
영화 시작때 워너와 DC 코믹스의 로고와 함께 흘러나오던 "Vespertillo"는 둔중한 느낌으로 사운드트랙의 시작을 장식하고, 히말라야에서 브루스웨인이 고행에 가까운 수련을 하는 동안 자신의 운명을 되짚는 과정에서 흘러나오던 비장미 만빵의 "Eptesicus"가 이를 잘 이어받는다.
한편으로는 브루스 웨인이 어린시절 부모님과 함께 행복한 순간을 보낼때 흘러 나오던 "Macrotus"의 전반부처럼 밝은 분위기도 종종 들리지만, 아무래도 영화의 전체를 지배하는 심상인 '암울함'이 사운드트랙에도 더 짙게 배여있다. (때로는 신경을 긁는 듯한 사운드 위주의 몇몇 중간 트랙들이 다소 지리하기도 하다.)
물론 화려한 액션에 어우러지는 박진감 넘치는 테마들도 유효하다. "Myotis"는 이미 최근 헐리웃 영화들의 예고편에서도 종종 쓰이고 있을 정도이며, 배트모빌의 추격전에서 흘러나오던 "Molossus"는 이 사운드트랙의 메인테마로 봐도 손색이 없다.
클라이막스가 지난 뒤 페허가 된 웨인 저택에서 레이첼과의 대화, 아버지를 추억하는 장면에서 나오던 테마와 엔드 크레딧 전의 장중함을 들려주는 "Corynorhinus" 역시 괜찮은 트랙.
다만, 영화 DVD를 보면 알겠지만 꽤나 짧지 않은 사운드트랙임에도 극중에 쓰였던 음악을 모두 담지를 않았다. 엔드 크레딧에서 흐르던 곡은 사운드트랙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있는데, 중간의 지리한 부분 대신 이런 연주들을 집어넣는게 더 낫지 않았을지? 이해가 좀 안가는 부분이다. (설마 사운드트랙 제작후에 영화 최종편집을?)
여하튼 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선이 뚜렷했던 90년대 중반까지의 배트맨 영화 음악(엘리엇 골든탈이 맡았던)들과는 달리 다시 대니 엘프먼의 스코어를 기둥으로 삼던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간 느낌. (그래도 1편은 프린스의 주제가에 많이 기댔었다.) 한스 짐머와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작품은 좀 더 구식에 가깝고...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워너뮤직의 라이센스 가격이 꽤 비싸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장중하면서도 섬세한 '대작용 영화음악 스코어'를 찾고 있었다면 강추할 만한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