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민함의 소유자인 동료 P. 새해를 맞기 며칠전 몇 년동안 도전하던 일이 큰 성과를 거두는 경사도 있었던 그녀에 대한 이야기....사실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어떤 '표현'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를 처음 안지 얼마 안되었을때 대화 중에 불현듯 나왔던 표현이 나를 놀라게 했었다. 아마 수입이 더 좋을 수 있는 제안을 거절했었던 나의 옛 이야기가 나왔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미친거 아냐?"
나는 저으기 놀랐다. 그 당시 P와 나는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초면에 뭐 막나가자 다짐한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엔 그녀나 나나 낯가림이 좀 있는 편이다.)
저 '미친거 아냐?'라는 글만 봐서는 굉장히 옹골찬 어투가 떠오를 만도 하지만, 정작 P는 굉장히 '나직한 목소리로' 저 표현을 구사했었다. (나지익하고 간결하게... '미친거 아냐..?' 상상해보라.)
아무튼 뜻과 표현방법이 표리부동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당황했다. '그래도 명색이 지성인인데 면전에 대고 미친게 아니냐고 말하다니, 정말 저 여자야 말로 미친거 아냐?'
P는 이후로도 가끔 '얌전한 성격의 여성이 쓰면 웬지 안 어울리는 표현'을 종종 들려주었다. ('재수없어', '쳇') P가 이런 표현을 구사할 때의 키포인트는 그 어색함이다. 그러다가 그 어색함이 뭐... 나름대로 일종의 개성처럼 굳어진거 같다. "그런 표현 써도 이상해. 어색해."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면 돌아올 답은 뻔하다. ('미친거 아냐?', '재수없어', '쳇' -_-;;;)
아무튼 '미친거 아냐?'만큼의 임팩트가 있는 표현은 없었다. 조금 과장스레 말하자면... 이 표현은 마치 냉소주의와 유유자적한 처세의 교묘한 믹스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이 표현의 원래 속성인지, 아니면 그 속성의 잠재성이 P에 의해서 깨워진 것인지는 몰라도... 암튼 그렇다.
일단... '미친거 아냐?'는 굉장히 많은 말에 일관적으로 대꾸가 가능하다.
"짜장면이나 먹자" "...미친거 아냐?"
"나 소개팅 나간다." "미친거 아냐?"
"5만원만 꿔주라." "미친거 아냐?"
"나 회사 3일 땡깠다." "미친거 아냐?"
"나 어제 야근해서 3일치 업무 다 했다." "미친거 아냐?"
"열받아 죽을거 같아." "미친거 아냐?"
"어제부터 옆구리가 살살 아픈데 장염인가?" "...미친거 아냐?"
심지어 같은 말에도 대꾸가 가능하다.
"미친거 아냐?" "미친거 아냐!"
(좀 심했나...)
물론 이 교묘한 다용성의 키포인트는 남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표현을 처음 들은지 1년 반이 넘은 지금. 지금은 그 약발이 좀 닳지 않았나 싶다. 얼마전 P와 문자를 주고 받았을때, '미친거 아냐?'로 대꾸가 오길래 '음, 예상 가능한 대꾸였어'라고 보냈더니 '재밌으라고 그랬다'라는 답문이 왔을때 이를 좀 더 실감했었다. (실망했어. P)
하지만 이게 뭐 삶을 지탱해주는 배터리도 아닌 바에야 그 닳은 약발이 아쉬울게 뭐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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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의 이야기는 커다란 농담이다. 작정하고 찾는다면 제2, 제3의 '미친거 아냐?'를 찾는게 어렵지는 않겠지. P가 이걸 의도해서 말하는 개그우먼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뭐라 말하기 힘든 뉘앙스의 그 표현이 튀어 나올때 대화하던 사람과 박장대소를 하는 기분은 참으로 재미나다. 물 흐르듯 오가는 대화의 한 턴에서 촌철살인처럼 '미친거 아냐?' 그 한 마디가 나왔을 때 느껴지는 기시감을 생각하면 뭐, 언어유희나 골계미가 다른게 있나라는 생각도 들 정도다.
아무튼 삶도 이렇게 적절한 타이밍에 통 터지는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나친 에너지 안들이고 그냥 헛웃음이라도 몇 번 신나게 터뜨릴 수 있는 그런 재미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