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였나... 아버지께 '수술하시다가 환자가 죽은 적 있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참으로 눈치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런거 가리기에는 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마침 다른 일을 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한번 씩 웃더니 대꾸를 안하셨다. 이쯤에서 잠자코 있을만도 한데, 나는 그 즈음에 읽고 있던 소설(아마 에릭 시걸의 [닥터스]였을 거다)에 나오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재차 물었다. "훌륭한 의사가 되기 까지 적어도 3명의 환자를 구하지 못한다면서요?"
그러자 첫번째 질문엔 별 대꾸 없던 아버지가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그러면 훌륭한 의사가 되려고 3명의 환자가 죽는걸 기다리냐? 한 명도 안 놓치고 모두 살려내는 훌륭한 의사가 될 생각은 왜 못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참 잘 노는 분이셨다. 주말은 기본이고 주중에도 여가만 났다하면 친구분들을 집으로 불러서 떠들석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고스톱판을 벌이셨다. 내가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성격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거라고 얘기할 정도였으니...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부지런한 분이셨다. 어릴적 나에게 '학회'나 '세미나'란 단어는 '아빠 일찍 일어나는 날'과 같은 뜻이었다. 학회나 세미나가 있다고 하시면 아버지는 해도 뜨지 않은 미명에 일어나 거실에서 슬라이드를 보며 발표 준비를 하셨고, 환등기 소리때문에 잠에서 깬 나는 발표 준비를 하는 아버지의 등에 붙어서 다시 잠이 들곤 했다. 등에 귀를 대고 있으면 아버지의 목소리 때문에 등이 울리던 느낌이 아직도 생각난다.
아버지의 자상한 모습은 (대부분이 그렇듯이) 고등학교때 잠시 휴지기를 가지셨다. 나는 적당히 공부하다보면 원하는 대학은 가겠거니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런 내가 탐탁치 않으셨다. 차라리 수준에 맞춰서 적당한 학교를 가려고 하면 낫겠는데, 되지도 않는 의대를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더욱 답답하셨을 거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갈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시는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는 더욱 완고하셨다.
"어찌해서 의대를 간다한들, 계속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 어림도 없어 이 녀석아. 그 정신상태로 공부하면 의사가 되기는 커녕 본과 가기도 전에 포기한다구"
아버지의 악착같은 성격을 닮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버지 아들이니까 어떻든 될거다'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설겅설겅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당연히 낙방했다. 재수에 삼수, 그 끝자락에도 결국 실패를 겪고 결국 2지망으로 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여기서라도 열심히 하면 된다라고 위로하셨지만 나는 여전히 뭔가 잘못된 양 기분이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이런 비장한(?) 태도도 잠시뿐. 나는 보상심리라도 생긴듯 신나게 대학생활을 즐겼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부'보다도 '대학 생활만' 즐겼다. 대중교통 간신히 끊기는 시간에 맞춰 살금살금 들어오고, 해가 중천에 뜨도록 퍼질러 자고 (학교는 다녔던가?).... 그런 루틴이었다.
ER 콜이 없으면 퇴근 시간이 빠른 편이셨던 아버지는 종종 어머니랑 셋이서 외식이라도 하자고 아침에 한마디하고 나가셨지만 나에게는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회동을 가지자고 하는데 언제 부모님이랑 식사할 시간이 있겠는가.
어머니도 가끔 보다못해 한마디 하셨다. "너 학교 끝나면 아버지 병원가서 밥이라도 사달라고 좀 그래라. 아버지 일하시는 데도 가보고 대화도 하고 좀 그래야지. 애기때는 출근도 못하게 매달리다가 병원까지 따라가고 그랬는데 나이들고 나서 어찌 그리 무심하냐. 자식 하나 있다는게..."
말도 안돼. 아기때는 다 아빠가 최고지. "하이고 엄마. 뭔 병원까지 찾아가서 아버질 만나요? 아파서 가는 데가 병원이지... 퇴근하고 집에서 같이 식사하면 되죠"
게다가 나는 '나름대로의' 효자였다. 외식 때 말 안듣는 자식이 빠져주면, 그건 그만큼 부모님의 데이트 시간을 마련해드리는 거라고 생각을 했으니.
97년 그 날도 그런 상황이었다. 내가 웬일로 집에 일찍 와서 붙어있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가족끼리 셋이서 외식이나 하러 가자고 하셨지만, 나는 학교 리포트가 있으니 두 분이 다녀오시라고 했다. 부모님이 나가신 뒤에 나는 '당연히' 피시통신에 접속해서 채팅방에 들어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저녁만 드시고 오신다던 분들이 10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어도 나는 '음, 데이트 한 번 제대로 하시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후 큰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고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실려 가셨다고 말씀하셨다.
겁에 질려 병원으로 가니 어머니는 몸도 못 가누시는 상태였다. 그때 대기실에서 아버지가 실려 나왔다. 혈종 제거를 위해 개두를 해야했고, 때문에 아버지의 머리는 스님처럼 빡빡 깍여있었다. 어머니는 오열하시며 침대에 매달렸고 나는 그저 빨리 수술실로 들어가는게 최선이다라는 생각에 어머니를 붙잡았다.
수술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목숨은 건지셨고 출혈도 막았지만 혈종이 뇌를 너무 눌러서 우측을 쓰기가 힘드시고 언어장애가 생기셨다. 그 뒤 반 년동안 답답한 병실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하셨고, 전반적인 컨디션이 좋아지신 뒤에 퇴원을 하셨다. 30년전 의사로서 이 병원에 오신 아버지가 환자로 병원을 떠나게 되신 것이다.
집에 오신 아버지는 비교적 편안해 하셨다. 몸이 불편하신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신지라 그럭저럭 잘 생활을 해나가셨고 재활운동도 꾸준히 하셨다. 한숨을 돌린 나는 그 즉시 사고 이전의 나몰라라 모드로 전환되었다. 아버지 수발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나는 내 할 일 즐기느라 바쁜 바로 그 상태로 말이다. 군대에 가있는 26개월이 좀 신경이 쓰였지만 아버지 컨디션도 좋으셨고, 어머니도 부담은 없으셨기에 휑하니 군대를 다녀왔다. 시간 참 빨리 흘러갔다. 제대하고 나니 아버지가 처음 쓰러지신지 5년이 되는 해였다.
어느날 아버지 소변에 피가 섞여 있었고 CT 촬영결과 고환에 작은 암세포가 있다는 판정이 났다. 다행이 조기 발견이었고 1시간도 안되는 수술로 제거하셨지만 이 때문에 다시 병원에 와서 입원하고 퇴원하는 과정이 아버지께는 꽤나 힘겨운 듯했다. 무엇보다도 이 병원에 환자로 오신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거슬리시는 모양이었다.
분당으로 이사오고 나서 2년. 이젠 건강한 사람도 노환이 생기는 칠순이 되셨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좋으셨다. 숨이 좀 가빠지긴 하셨지만, 수족이 편치 않은것 외에는 웬만한 노인들보다도 더 건강한 편이라고 해도 될 만 하니까. 하지만 올해 초부터 다시 소변에서 피가 나오셨고 내시경 검사 결과 이전 수술 부위가 건드려져서 피가 나오는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통증까지 느끼시는 바람에 지난주 다시 CT 촬영을 했고 비슷한 부위에 다시 암이 재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복부나 간 부위보다는 여전히 제거가 용이하지만 암은 암이었고, 3년전 제거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이야기까지 전해들었다.
수술을 앞두고 어제 입원을 하셨다. 어머니께 전화를 해보니... "그래도 병원이면 분위기 알만큼 아실텐데 아버지가 편치가 않으시다 야. 개그 콘서트 봐도 웃지도 않으시고... 너 내일 수술 전에 빨리 좀 와서 위로 좀 해드려라"
오늘 아침 병실로 가니 아버지 눈이 퀭하셨다. 눕기만 하면 코를 고시던 분이 어제는 계속 잠을 못이루셨다고... 어머니 역시 뜬 눈으로 보내신듯 했다.
"아버지. 그 끄트머리에 있는 암 쪼그만거를 레이져로 지지는 수술이래요. 아시잖아요? 아버지는 보신적 없나? 외과라서 그런건 못보나? 한 시간이면 끝나는데 뭘 그걸 걱정해서 잠도 못자고 그러신대요?"
티비에서는 스포츠 진기명기로 웃기는 순간포착들을 방영해 주고 있었다. 진짜 웃기는 프로그램이었고 세 식구는 병실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엄마. 뭐, 아버지 잘 웃으시네. 무슨 코메디 프로그램을 봐도 안 웃으신다고 그래요?"
".... 아니야. 너 오기 전까지는 정말... 웃지를 않으셨어. 이 녀석아..."
걱정할 일 없었다. 비뇨기과 과장님도 외부에서 종양을 제거해 나갈거니 3년전 수술처럼 1시간만에 끝날 거라고 하셨으니까. 게다가 연로한 아버지에게 전신마취는 안좋으니, 척추마취만으로 진행할 거라는 이야기까지 해주셨다. 전신마취가 불안했던 나와 어머니는 거기에서도 일단 한시름을 놓았다.
하지만 수술은 길었다. 정말 1시간만에 끝나서 엄마와 나를 황당하게 안심시키는 그런 결과를 기대했는데... 4시간이 지나도 '수술중' 램프는 도통 꺼지질 않았다. 잠시후 아버지 후배인 김재중 선생님이 오시더니 생각보다 종양이 커서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계속 머리만 싸안고 앉아 계셨고... 나는 침이 말랐다.
'아까 수술실 들어가기 직전에 아버지한테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 아버지가 그 때 내 눈을 바라보고 계셨나..?'
5시간쯤 될 때 수술등이 꺼졌고 어머니는 회복실로 들어 가셨다. 빨리 나오실 줄 알았건만... 10분이 지나도 나오시질 않으시고 나는 계속 맴돌기만 했다.
겨우 한시름 놓은 것은 아버지 침대가 나오면서 뒤따라 나오시는 어머니의 밝은 표정을 본 뒤였다. 주변의 선생님들도 싱글싱글 웃고 계시고... 나는 어깨에서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다.
힘들어진 수술이었지만 더 문제는 길어진 시간이었다. 전신마취가 아니었던 탓에 아버지는 뜬 눈으로 5시간을 버티셔야 했었고, 무엇보다도 진행 상황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생기실까봐 참관하던 다른 선생님께서 얼굴을 보며 종종 보고를 해주셨다. 다행이 아버지는 상황보고를 잘 알아들으시고 눈을 껌뻑거리시면서 마칠 때까지 잘 참아내셨다.
"아무튼 아버님이 느긋하게 참아 주셔서 잘 되었다!"
같이 계시던 선생님이 등을 두들겨 주시며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회복실에서 나오신 아버지도 안심이 되시는 모양이었다. 힘은 없으셨지만 미소를 짓고 계셨으니까.
"여보. 재혁이 왔어. 여기 밖에서 계속 기다렸다"
엄마가 아버지 뺨을 가볍게 두들기며 내 쪽을 가리키셨다. 큰 수술을 마치셨는데도 아버지 혈색은 더 좋으신 듯했다. 아마 긴장이 풀리셔서 그랬으리라.
"고생하셨어요." 아직은 나보다도 더 손아귀 힘이 쎄신 왼쪽 손을 잡으며 아버지 얼굴을 바라봤다.
근데, 미소를 짓고 계시던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주르륵 흘렀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은 처음 보는것 같았다.
수술 잘 마치고 나오시더니 왜 아들 얼굴을 보며 우시는거야..? 나는 행여나 어머니가 볼까봐 빨리 손으로 눈물을 닦아드렸고, 간호사들은 병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아버지 침대를 옮겼다. 아버지 침대가 들어가니 엘리베이터는 꽉 찼다.
"엄마. 저는 걸어서 올라갈께요."
"그냥 타. 여기 공간 있어."
"아니야... 나 전화할 데도 있어서 복도에서 통화 좀 하고 올라갈께요."
"재는 무슨 사업가야. 사업가. 맨날 전화 오고, 전화 걸고.... 빨리 하고 올라와!"
복도 계단으로 향하는 5미터 동안도 계속 아버지의 눈물이 머리에 남았다. 거참 애처럼 그 순간에 왜 우시냐구. 옆에 친구분들도 계신데, 부끄럽게 말이야.
복도로 나오니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넌 왜 우는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게 기뻐서? 잘 참으신 아버지가 대견해서? 그동안 못해드린게 죄송해서? 알 수 없었다. 알아내려고 고민할 시간도 없었고. 전화 한 통화 하고 올라간다고 했으니 빨리 올라가야지.
척추마취 후에는 베개를 빼는 것이 좋다해서 그렇게 했는데 옆에서 보기엔 영 불편해 보였다.
그래도 웬걸. 머리가 닿자마자 예의 드르렁 소리를 내시며 코를 골기 시작했다. 엄마도 의자에 털석 앉으시더니 이제 뭐 좀 먹자고 하시고... 하긴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먹었으니....
"넌 가라? 수술도 끝났는데. 일하러 가던지. 아님 여기서 좀 자고 가던지"
"엄마나 주무세요. 엄마도 못잤다며"
"난 뭐 좀 먹고 눈 좀 붙이던지 해야겠다. 넌 뭐 안먹어?"
"저는 그럼 사무실 가서 먹죠 뭐. 지금은 별로 안고파서.."
"그래라....얘! 이따 아버지 일어나면 전화 좀 해서 안심시켜드려"
"안심은 무슨. 다 잘된거 아버지도 아시는데. 그리고 아버지 일어나시면 어머니가 전화를 해주셔야죠. 언제 일어나실지 내가 어떻게 알고"
"아. 그래. 내가 정신이 없어서... 알았어. 전화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