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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의 일상, 대중문화, 그리고 보드게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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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 / 2006)
    CULTURE/Movies 2007. 1. 17. 05:26

    감독 : 마틴 캠벨
    주연 : 다니엘 크레이그, 에바 그린, 매즈 미켈슨, 주디 덴치

    (2006년과 1967년 카지노 로얄, 그리고 몇몇 다른 본드 영화의 스포일러 있음)

    "베스퍼는 자네 목숨을 담보로 거래했어. 그래서 거기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거야"
    "......곧 복귀하겠습니다"
    "만약 시간이 더 필요하면..."
    "아니요. 임무는 끝났고 계집은 죽었어요."
    "마티즈의 혐의는 풀렸군.."
    "아니요. 베스퍼의 혐의만 확인된거죠"
    "아무도 못믿는군."
    "못 믿습니다."


    온갖 닭살 돋는 멘트를 뿌리며 모래사장, 의무실에서 부둥켜 안고 즐겁게 뒹굴던 제임스 본드와 베스퍼 린드.
    그러나 이후 갑자기 닥친 베니스에서의 악몽 이후 본드와 M이 나누는 이 대화.

    파란 눈이어서 웬지 초점이 흐릴것 같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눈빛이 우수에 잠겼다가 갑자기 이를 앙다문 17살 소년처럼 분기탱천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잘난 근육을 한번 씰룩거려서가 아니라 그냥 몸에서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나서 마지막 장면에서 "The Name's Bond... James Bond"를 한번 읊어주는 그 순간. 예의 '제임스 본드 테마'와 함께 나오는 엔딩 크레딧이 갑자기 화면을 어둡게 하지 않았다면, 그 뒤로 "니들 이제 다 죽었어"라는 대사가 한 마디 더 나올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카지노 로얄]의 본질적인 차이는 새로운 발전이 아니라 완전한 복고로의 회기라고 할 수 있을듯 하다. 그것은 Q가 전해주는 특수무기가 등장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몸으로 치고박는 육탄전의 비중이 커졌기 때문도 아니다. 냉혈한 이미지의 인상을 반영하는듯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듯 한 MI6 요원 제임스 본드가 어쩌다가 이렇게 복잡한 인물이 되었는가의 과정을 소상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지노 로얄]의 초반부에서 제임스 본드는 그야말로 필요에 의한 우군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007 영화와 다르게 흑백으로 차분하게 시작했던 오프닝의 체코 장면은 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장면. 살인면허 취득 이후 두번째 암살 대상이 된 드라이덴은 본드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어떻게 죽였지?"
    "당신 연락책? 편하게는 못갔지"
    "자네도 불편했군 그랬지? 걱정할 거 없어. 두번째는..."
    (총쏴서 죽인뒤) "그래.. 상당히 괜찮아지는군"

    이게 킬러 전문 악당이 읊을 대사지, 어찌 지구를 구할 제임스 본드 입에서 나올 대사인가..


    물론 다니엘 크레이그의 인상도 한몫한다. 캐스팅때부터 '마티니 보단 맥주가 어울릴 듯한 노동자 이미지'로 워낙 회자된 그였지 않은가. 특히 본드가 오션 클럽에서 주차원으로 오해받는 장면은 그 절정이다. 만약 피어스 브로스넌이라면 이런 설정은 어림도 없지.

    여성 편력 역시 마찬가지. 그가 오션 클럽에서 추적대상의 부인인 솔랑게와 베드신 비스므리한 장면을 연출하다가 '와인과 1인분 레시피'만을 주문한 뒤 급하게 공항으로 떠나는 장면은 브로스넌의 느물느물 본드 스타일보다는 일단 일하나만 바라보고 우직하게 돌진하는 워커홀릭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전환점을 마련하는 것은 베스퍼 린드의 등장. 본드와 린드는 마치 흑백영화 시대에 나온 스크루볼 코메디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서로서로의 신경을 벅벅 긁는다. ("당신 내 타입 아녀", "똑똑해서?", "싱글이어서") 역시 내츄럴 본 젠틀맨인 (미안해 하도 거명해서..) 브로스넌의 본드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

    그러다가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꼬물꼬물 인정을 느끼는 장면은 정말 재미나다. 역시 대표적인 장면은 '디너 재킷' 장면. 자기 멋대로 남의 디너 재킷을 고른 베스퍼에게 열받은 본드는 "우쒸!" 한마디 던지려다가, 그냥 입고 따지려는 듯이 한 번 입어본다. 그런데 의외로 잘 어울리는 턱시도. 그걸 슬쩍 보는 베스퍼가 밝게 웃는 모습은 정말 맘에 들었다. 카지노 로얄에서의 전운을 앞두고 참 옛스러운 유머의 사인을 남긴 것 아닌가. 그리고 생사의 담보가 오가는 후반에서 두 사람은 '위기가 사랑을 만든다'는 간단한 명제의 확인 절차를 밟아간다. (샤워실 장면!)


    (조금 완급이긴 했지만) 본드의 사임 결심은 정말 간절해 보인다. 그래서 베스퍼의 죽음 이후 분노가 더 와닿는 것일지도. 베스퍼는 수많은 영화속에서 눈요기로 등장했다 죽은 본드걸들과는 다르다. 최근의 공식(?)을 따르면 베스퍼는 본드에게 액션신 하나를 부여해주기 위해 위기에 빠져야 하고 곧 구출될 운명의 본드걸이 되야 한다. 하지만 베스퍼는 허무하게 죽고 '빨리 비밀요원 관두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꿈에 빠져있던 본드의 사고 동선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심지어 그녀가 배신을 하려고 했다고 쳐도 말이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엔딩이 너무나 쇼킹했던 [여왕 페하 대작전 (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의 데자뷰 현상이 마구 일어난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본드는 결혼을 한지 한 시간도 안되어 악당들에게 아내를 잃는다.)

    엔딩신에서  미스터 화이트의 다리를 쏜 뒤 본드가 "The Name's Bond.. James Bond"를 읊는 순간 [카지노 로얄]의 러닝타임 내내 쌓아올린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에 대한 당위성이 완성된다. 그 안에는 악당에게 필적할만한 냉철함과 위험스런 매력이 있었고, 삶을 바꾸려고 했던 사랑과 이를 무너뜨린 배신으로 울었던 한 남자의 곡절이 담겨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액션 장면 이야기.

    중반까지는 본드 영화 답게 세계의 명소 유람으로 잘 이어가던 영화가 갑자기 중반부터 꽤나 긴 시간을 몬테네그로의 카지노 로얄 건물에서만 할애를 한다. 이곳에서의 정체가 좀 길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영화를 본 후 시간이 지나니 다소 길다고 생각했던 카지노 로얄에서의 장면도 꽤 잘 짜여졌다는 생각이 든다.

    몇십억을 담보로 하는 타짜 놀음. 홀뎀포커에 대한 룰을 모르지만 사실 이 과정의 요지는 포커 게임이 아닌 두 캐릭터의 갈등 구조다. 매즈 미켈슨이 연기한 악당 르쉬프는 영화 초반의 보트신에서도 보여지듯이 수학적인 확률에 대해 철저하리만치 의존하는 기계적인 갬블러. 반면 본드는 블러핑으로 플레이어간의 인터랙션을 내다보는 심리전 베테랑이다. 따라서 제임스 본드는 오만가지 잡다한 상황을 일으키며 르쉬프의 신경을 긁는다. 제임스 본드가 바텐더에게 갖가지 주문을 담은 칵테일을 주문하고, 덩달아 주변 플레이어들도 따라서 음료를 주문하고... 이거때문에 르쉬프가 "이제 다 됐소?"라고 짜증을 내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재밌는 조크였다.

    그 대결이 늘 수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점도 큰 전환이었다. 역블러핑(?)에 당한 본드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들고 가는 장면은 이 상황을 거의 극한으로 몰아낸다. 여기서 고정 캐릭터인 CIA의 펠릭스 라이터를 소개하면서 그가 돈을 꿔주는 협조체제로 대체를 하는 것 또한 영리했다. 캐릭터 소개도 하면서, 억지로 몰리던 상황을 다시 본 궤도로 돌아오게 했으니까.

    결국 카지노 로얄의 절정은 카드의 변칙 술수나 신무기를 사용한 속임수, 혹은 무력에 의한 판 뒤집기가 아닌 '본드가 정말로 제대로 이겨서 억대의 돈을 따내는 것'으로 끝난다. 르쉬프는 사실상 그 장면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것이나 다름없다. 카 체이스와 고문씬이 이어지긴 하지만 그 과정은 사실 르쉬프의 죽음, 그리고 미스터 화이트의 소개를 위한 여벌 장면이나 다름 없었다.


    감독은 카지노 로얄 장면의 중간에 남아공 테러리스트들의 습격으로 물리적인 액션을 가미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것은 르쉬프가 사용하는 독극물 장면. 본드의 임기응변 대처와 베스퍼의 도움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느긋한 눈치 싸움의 연속에서 충분한 변주를 준다.

    이런고로...나는 도박 장면이 쓸데 없이 길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차라리... 고문이후 제임스 본드와 베스퍼 린드의 애정행각이 조금 어색했다는 의견이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마다가스카르에서의 러닝 액션, 마이애미 공항에서의 액션. 더 말할 필요 있나? 안그래도 아날로그 액션 스타일(배트맨 비긴즈!)에 대한 호감이 마구마구 솟구치는 바람에, '과연 매트릭스나 스파이더맨이 잘 만든 영화인가?'라는 불손한 생각까지도 몽실몽실 드는 요즘인데... [카지노 로얄]에서의 살냄새 나는 액션들은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의 런다운은 보고 또봐도 재밌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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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의 기억속에 기이하게 담겨있는 영화중 하나가 1967년의 [카지노 로얄]이다. 이안 플레밍의 원작을 따로 사서 유명한 감독들이 공동 연출했던 코메디 버젼 제임스 본드 영화 말이다.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그 역시 카지노에서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분명히 황당 코메디인데 제임스 본드가 나왔던 - 그 아귀가 안맞는 상황.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폭탄이 터졌던가 뭐던가..아무튼 어떤 이유로) 캐릭터들 전부가 죽어서 천사가 되는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그 영화의 캐릭터들 이름도 전부 '르쉬프'나 '베스퍼 린드'였다. 물론 원작 소설에 충실했기 때문에.)

    이런 이미지의 영화로 각인된 소설을 다시 한번 스크린에 옮기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도박이었을꼬. 그러나 감히 말하건데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성공적이다. 캐릭터 구축에 큰 공을 들인 연출이니 이런 패턴이 다음 본드 영화에서도 잘 이어져 갈지는 미지수지만, 전환점을 마련해보겠다는 기획만큼은 답지를 받은 것 같다.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는 연출 방향인 것도 사실이다. 007 영화라면 007 답게 하이테크 액션이 주종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카지노 로얄]을 심심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액션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이 영화에서는 '장면'보다 영화 '전체'에 대한 잔상이 더 크게 남았다. 아마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이 그런 감상에 일익을 한듯하다.

    어쨌든 당연히 스킵해야하는 007 DVD 가운데서 최초로 사고 싶은 작품이 되었다. 살 거 점점 늘어나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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