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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 (The Glarmour / 1984)CULTURE/Books 2007. 2. 25. 02:58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 김상훈 역 (열린책들 / 2006)촬영기사인 리차드 그레이는 IRA의 폭탄 테러 현장 근처에 있다가 큰 부상을 입고 그 덕분에 사고전 몇달간의 기억을 잃는 역행성 기억 상실에 걸린다. 요양중인 그레이에게 수잔이란 여인이 찾아오고 그녀는 자신이 그레이와 연인사이였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지만 점점 수잔에게 마음을 여는 그레이. 그는 수잔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고리라는 생각,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녀에게 점점 매달린다.
하지만 그레이는 수잔의 옛 연인이었던 나이얼에 대한 의식, 그리고 여기서 생기는 수잔에 대한 의심으로 번뇌한다. 그레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이얼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잔. 답답해하는 그레이에게 수잔은 나이얼에게는 '매혹(The Glamour)'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소설의 제목 'The Glamour'는 사실 '매혹'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프리스트의 또 다른 소설의 제목인 'The Prestige'에서 '프레스티지'가 단순히 '명성' 혹은 '트릭'으로 쓰이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소설이 전개되어 가면서 말 그대로 소설 안에서 또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지칭되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받는 단어라고나 할까. 이 의미는 소설이 진행되어 갈수록 점점 변화한다. 따라서 역자가 편의상 붙인 '매혹'이라는 제목 역시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을 듯.
요양소 장면 이후 그레이의 1인칭 시점으로 시작되는 두 사람의 과거는 여느 연애 소설처럼 자연스럽고 한편으로는 애절하게 그려져 있다. 말그대로 '나도 저렇게 연애해 봤으면'하는 맘이 들도록 유럽의 풍광을 여기저기 흩어가면서 말이다.물론 여기서 전환은 생긴다. 바로 이 연인들의 사이에 은근슬쩍 잠입하는 나이얼의 존재. 수잔의 옛 애인인 나이얼은 파괴적이라기 보다는 신경을 긁는 듯한 느낌으로 난입한다. 나이얼을 인지하고 그에게서 피하려는 사람은 오직 수잔뿐. 그 연적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레이는 심난하기만 하다.
다시 시점이 수잔의 1인칭 시점으로 바뀌고 The Glamour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는 지점에서 소설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The Glamour를 갖고 있는 이들은 보이지 않게 되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 소위 말하는 투명인간이 아닌 '불가시인'이다.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주변의 단계에서 가장 하위로 자신을 몰아넣고 거기에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그 능력의 레벨에 따라 또 다른 불가시인들을 인지할 수 있고, 그들이 행사하는 물리적인 행위도 파악한다.The Glamour의 능력을 정점으로 가진 나이얼은 그 힘에 동경되어온 수잔(그녀 역시 The Glamour를 갖고 있다)과 함께 마치 히피같은 삶을 살았고, 여기에 도취되어 그 자신이 통제되기 힘든 단계에 까지 이른다. 수잔은 리차드에게서 탈출구를 찾고 나이얼에게서 빠져 나오려 하지만 나이얼은 점점 집착처럼 두 사람에게 매달린다.
소설 속의 두 남자 그레이와 나이얼은 질투심을 엔진으로 움직인다. 대부분의 갈등 구조가 그렇듯이 이 상황에서 피폐해지는 것은 중간에 낀 불쌍한 수잔. 그녀는 행적에 대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의심까지 덥썩 덥썩 받아가며 그레이와 나이얼 사이를 오간다.문제는 그레이. 그는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나이얼에 대해 분노한다. 왜 수잔은 자신을 선택했을까? 기억의 단서가 조금씩 풀리면서도 뭔가 이빨이 안맞는 톱니바퀴처럼 어긋나는 현재와 과거에 대해 그레이는 궁금해 한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에 대한 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수잔은 그레이에게 '조작될 수 있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람은 픽션을 창조하는 존재야.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사람은 현재의 자기상에 맞춰 기억을 재배열하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그러지는 않아... 자기 자신을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픽션으로 고쳐 쓰려는 욕구는 우리 모두의 내부에 깃들여 있어."
풀릴듯 풀릴듯 하면서도 풀리지 않은채 파국으로 이어져 가는 결말부분에서 프리스트는 -나름대로 충격이라면 충격일- 결말을 던진다. 어찌보면 시점의 전환과 전환에서 무책임한 마무리를 지었다고 할 수도 있고, 감히 생각하자면 프리스트 자신이 세 캐릭터를 그려나가는 작업 자체에 압도 당한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기까지 할 정도다.그렇기에 아 이런 것이었구먼!하는 해결보다는 책을 덮은 뒤 더 끊임없는 질문이 나오는 이야기. 하지만 초반부의 연애담과 갈등의 과정은 별로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해주고, 글래머의 정체가 나오는 시점부터는 원색적인 서스펜스까지 자아낸다. 세 캐릭터의 존재감에 대한 독자의 상상을 작가의 배치를 참조하며 적당히 배열할 수 있다면 그 결말 후에도 꽤나 큰 잔영이 남는 이야기였다. 완결적인 느낌에 있어서는 [프레스티지]가 한 수 위인듯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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