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개봉후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어둠의 경로'로 먼저 본 국내팬들 역시 극찬을 보낸 영화. 결국 2005년 아카데미 각본상까지 거머쥐었다. 이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임에도 국내에서는 지각개봉에 스크린 수도 그다지 못잡은듯 하다. 늦기전에 부랴부랴 가서 봤다.
정말 좋았다.
심성착한 회사원 조엘(짐캐리). 어느날 충동적으로 회사를 결근하고 몬토크행 기차에 오른다. 거기서 독특한 성격의 아가씨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을 만나고 둘은 가까워 진다.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 성탄을 앞두고 을레멘타인과 헤어진 조엘의 모습을 보여주며 갑자기 영화는 방향 선회를 한다. 조엘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클레멘타인을 보며 아연실색한다. 하지만 곧 그녀가 '라쿠나'사의 기술을 이용해서 조엘에 대한 기억만을 지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엘 역시 라쿠나사의 시술을 시도하지만 기억 삭제 도중 그는 추억만은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펄프 픽션]이나 [메멘토]처럼 역전 구성을 갖고 있다는 것도 스포일러가 될까? 사실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기억 상실이라는 SF적인 설정이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로맨틱 코메디이다. 물론 그만큼 '로맨틱'하지는 않다. 오히려 살벌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첫 눈에 이끌림으로 시작한 조엘-클레멘타인 커플. 그러나 그들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건 불륜이나 섹스트러블 같은 '결혼과 전쟁'식 문제가 아니다. 모든 연인들이 의례히 겪는 그런 일들이다. 머리를 감고난 후 비누에 묻은 조엘의 머리칼에 불만을 늘어놓는 클레멘타인, 자유분방한 클레멘타인의 성격때문에 홧김에 (맘에도 없는) 심한 말로 상처를 주는 조엘. 어느 순간 너무나 뜨겁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너무나 냉랭해지고 작정한 마냥 상처를 주는 두 사람. 정말로 그들은 여느 연인처럼 헤어진다.
영화의 주된 부분은 기억 삭제 과정에서 보여지는 조엘의 정신 세계이다.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린다. 그러나 라쿠나사의 직원들의 작업으로 그 추억은 점점 삭제 된다. 뮤직 비디오 연출가로도 잘 알려진 감독 미셀 공드리는 정말 기가막힌 방법들을 동원해서 무너지는 조엘의 심리세계를 묘사해 나간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동차, 어느쪽으로 가도 똑같기만한 거리의 모습, 형체는 있지만 얼굴이 없는 사람들... 그 덕분에 영화는 중간쯤 거의 호러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더 필사적인 것은 조엘의 모습이다.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을 위해 자신의 기억들의 편린을 찾아 헤매는 모습, 왜 '함께한 시간'의 가치가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는 모습은 좋은 연출력, 그리고 짐 캐리의 호연으로 잘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지만 짐 캐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소화할 수 없을 연기였다.
오색빛 찬란한 결말이 아니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아픔또한 남는다. 그것을 목도하고도 다시 걸어가야 하는 그길. 그러나 조엘은 "뭐 어때요?"라고 한마디 던지고 클레멘타인과 함께 겨울 바다를 뛰어간다.
아마 대부분의 극장에서 내렸을터. 게다가 아무에게나 강추하기는 좀 주저되는 영화다. (내 옆에서 보던 아저씨는 그야말로 코를 신나게 골면서 잤다.)
하지만 대충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어떤 분위기인지는 알만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끌림이 있다면 [이터널 선샤인]은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