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피터 잭슨
주연 : 나오미 와츠, 잭 블랙, 에이드리언 브로디
확실한건 이 영화는 제시카 랭이 킹콩의 손에 붙잡히고 킹콩이 (지금은 무너진) 세계 무역 센터를 뛰어다니단 70년대 영화의 리메이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몇번 본적도 없는 30년대 흑백 영화의 철저한 리메이크다. 이 영화에서의 킹콩도 30년대 흑백 영화처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오르며 해골섬에서 각종 공룡과 싸운다. 소재의 다양함을 추구했지만 예산이 없었던 30년대의 순수한 업그레이드인 셈이다. 어정쩡한 절충책을 찾은 70년대 버젼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각종 사이트에서 극찬을 거듭하고 있는터라 개봉날 달려가서 봤다. 비슷한날 국내 개봉해서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태풍]에 비해 상대적으로 스크린 수도 못얻은터라 불리한 흥행의 사각지대에 놓인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는데....
글쎄.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작품은 아니었다. 나의 단순한 판단 잣대중 하나인 '재관람 욕구'가 그다지 크게 생기는 영화는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전반부의 지루함은 -못참을 정도는 아니어도-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감독의 생동감 있는 연출로 어느정도 커버되긴 했다. 공황시대의 미국의 스케치,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구축도 공을 많이 들였다. 하지만 해골섬으로 가는 여정까지는 괜찮았지만, 막상 해골섬으로 들어가면 곧장 킹콩이 나오겠지하는 기대가 컸던 것인지 그 지루함이 약간은 크게 와닿았다.
킹콩의 등장 이후 상황은 확실히 나아진다. 해골섬에서의 전투씬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헐리우드 롤러코스터 액션이었다. 킹콩과 앤 대로우(나오미 와츠)가 등장하지 않는 액션신은 뭐랄까... 감정이입이 부족했지만 스펙타클과 호러의 이미지를 적절하게 섞는 묘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잘 이어진다.
하지만 액션의 시퀀스보다 더 강하게 와닿았던 것은 킹콩이라는 캐릭터의 감정 묘사였다. 해골섬에서 앤과의 감정 교류는 '미녀를 인형삼아 가지고 노는 페티시즘 매니아'였던 예전의 킹콩의 오명을 씻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남성 호르몬 왕성한 괴물이라기 보다는, 삶에 지친 전사라는 이미지가 더 크게 느껴지는 킹콩의 묘사는 정말 대단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그다지 재밌게 본 편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피터 잭슨의 서사적 얼개에 대해 완전하게 마음이 열린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킹콩] 역시 '시간 가는줄 모를' 정도로 즐거이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완벽에 가까운 영화 기술의 완성, 그리고 그 기술에 눌리지 않은채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내고, 사람이든 CG 캐릭터든 가리지 않고 풍성한 연기를 담아낸 그 연출력은 즐기고도 남을 정도였다. 괜찮은 배우들을 갖다 놓고도 어찌할 줄 몰라서 좌충우돌하고 실소의 연속만 자아낸 곽경택의 [태풍]보다야 백배는 나은 영화였다.
PS : 자본력의 승리라고 이를 말할 수 있을까. 곽경택에게 [킹콩]에 제작비 만큼을 쥐어주고, 이거 반정도의 수준이라도 되는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한다면.... 절대로 못할걸.
PS 2 : [태풍] 감상문은 안쓸란다.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날, 흔하지 않은 형태의 감상문이 나올 듯한데... 그런 글을 내 블로그에 올리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