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꺄오!)을 다닌 학교. 그 마지막 학기때 들은 수업이 바로 '영화와 사회학'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였기에 마지막 학기에 부담없이 들으려고 선택한 수업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밌는 수업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답답한 수업'이었다.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강사는 나름대로 재밌는 컨셉의 방향을 잡기 위해 영화와 사회학을 연결하는 시도를 했지만, 그의 수업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인터넷에 횡행하고 있는 콘텍스트의 노골적인 인용이었다. 심지어 수업을 듣다가 '이쯤되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겠군'이라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그 이야기가 나오는 뭐 그런 식이었다.
그 수업의 후반부를 장식한 것은 자신이 한 편의 영화를 선정해서 그 영화에 담긴 사회성을 연결짓는 리포트를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운나쁘게 이 리포트를 '발표'하는 예닐곱명중에 내가 끼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기왕이면 튀고 싶었다. 적어도 '나 사회성 담긴 영화요!'라고 두 팔 들고 광고하는 영화를 다루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고민이 생길때쯤에 이미 발표할 영화는 마음속으로 정한 상태였다. 바로 브라이언 싱어의 영화 [엑스멘] (2000) 이었다. 그렇다. 2000년 여름에 개봉했던 그 블럭버스터 영화 말이다.
발표날. [말콤 X], [아메리칸 사이코], [매드 시티] 등 모범적인 '사회성 영화'들을 소재로 삼은 발표들이 끝난 뒤, 나는 조금 긴장하며 앞으로 나서서 "저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멘]을 발표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아... 재수없는 강사.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오만상을 찌푸리며 "엑스멘이요??? 그 수퍼맨 같은거?"라고 소리 드높여 물어서 나를 더 쪽팔리게 했다.
미국 굴지의 코믹 프랜차이즈인 마블사의 작가인 스탠 리. [스파이더맨]을 만들었던 그의 원작인 [엑스멘]은 먼저 만들어진 선배들인 수퍼맨이나 배트맨에 비해 훨씬 뒤틀리고 복잡한 세계관을 가진 수퍼 히어로물이다. 수백명에 이르는 캐릭터들, 황당함의 극치인 그들의 초능력들은 아무리 CG가 발전했다 해도 결코 영화화하기에는 만만한 계획이 아니었다.
이를 떠맡은 감독 브라이언 싱어도 미심쩍은 선택이었다. 그의 전작중 잘 알려진 것은 잘 알려진 스릴러 [유주얼 서스펙트] 한 편뿐. 이안 맥켈런과 찍은 스티븐 킹 원작의 [죽음보다 무서운 공포](Apt Pupil)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그의 영화들은 SF물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런 그가 황당함의 극치인 [엑스멘]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싱어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첫 장면부터 제시한다. [엑스멘]의 첫 장면은 배트맨 시리즈처럼 주인공 캐릭터가 무기를 턱턱 장착하는 장면이 아니다. 그야말로 생뚱맞은 1944년의 폴란드, 유태인 수용소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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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함께 수용소에 수감되는 어린 유태인 소년 에릭 렌셔. 그는 겁에 질린 눈으로 수용소의 유태인들에게 찍힌 낙인을 바라본다. 그리고 부모님과 강제로 헤어지는 순간 그가 손을 뻗자 닫힌 철문이 종이처럼 마구 구겨진다. 그는 바로 자기장을 마음대로 다뤄서 금속을 통제하는 초능력을 갖고 있는 돌연변이였다. 그리고 그는 50여년 뒤 '매그니토'라는 이름으로 돌연변이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영화의 본 스토리가 진행되는 멀지 않은 미래. 초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은 그야말로 소수자들을 대변한다. 유추해보건데 브라이언 싱어 자신이 유태인이기에 ('싱어'란 성 자체가 유태인 이름 아닌가) 홀로코스트를 돌연변이 대립의 단서로 시작한 듯. 그리고 근미래의 배경에서 소수의 차별받는 돌연변이들은 유색인종이나 동성애자 등의 소수를 대변하고 있다. 그들은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수퍼히어로들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소수에게 냉담하다. 상원의원인 로버트 켈리는 돌연변이 차별법안을 상정시키려고 노력한다. 에릭 렌셔-매그니토는 그런 세상에게 분노를 발한다. 홀로코스트의 악몽에 사로잡힌 그는 이제 세상의 차별이 유태인에게서 돌연변이로 옮겨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가장 최선의 해결책은 전쟁이다.
하지만 여기에 맞서는 사람이 바로 에릭 렌셔의 오랜 친구이자, 정신력으로 가장 최강의 돌연변이인 찰스 이그재비어 교수이다. 그는 돌연변이의 능력을 남용하지 않고 인간과의 공존을 위해 올바르게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같은 그들의 대립은 결국 친구 사이마저도 갈라 놓고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으로 만든다.
두목격의 두 돌연변이 이외에, 1편에서는 두 명의 돌연변이가 축으로 회자된다. 아무리 상해를 입어도 금새 재생되고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금속 골격을 가진 로건-울버린, 그리고 접촉하는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 돌연변이의 경우에는 그 능력까지 흡수하게 되는 로그. 세상과 등지고 살던 두 명의 돌연변이는 이그재비어 교수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힘을 합쳐 매그니토와 싸우면서 공존을 배우게 된다.
엑스멘 1편은 성공적이었다. 수퍼 히어로 물은 지극히 단순한 영화라는 편견을 깨는 시발점을 마련했던게 바로 이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덕분에 '스파이더맨', '헐크', '판타스틱 포' 같은 마블 원작의 영화들이 연이어 나오게 되는 기폭제가 생겼고.
3년뒤 만들어진 2편은 1편에서 구축된 캐릭터들, 그리고 추가된 여남은 캐릭터들로 조금 더 확장된 플롯의 나래를 펼쳤다.
여기서 축이 되는 인물은 돌연변이가 아닌 미국장성 윌리엄 스트라이커 장군. 돌연변이인 아들때문에 아내를 잃은 그는 증오로 모든 돌연변이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때문에 이그재비어의 엑스멘과 매그니토는 잠시 손을 잡게 된다.
특정 소수에 대한 차별에 대한 복선은 2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로그의 남친이 되는 아이스맨-바비는 자신이 돌연변이임을 밝히지만, 엄마는 안타까워 하면서도 "돌연변이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해보았니?"라고 묻는다. (동성애자의 커밍아웃때 부모들이 하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여기에 대표적인 호모 배우인 이안 멕켈런(매그니토 역)이 악한 엑스멘의 리더로 등장하는 것 또한 중의적인 복선 중 하나로 봐도 될 것이다.
물론 [엑스멘]의 천성은 블럭 버스터 무비다. 1편과 2편을 거듭하면서 돌연변이들의 온갖 능력과 이를 이용한 대결 구도는 역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사실 전반적으로는 액션의 동선이 영화에서 더 앞서 나가있다. 하지만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부실한 플롯이 아닌, 탄탄한 기반 위에 선 액션들은 분명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분명 [엑스멘] 시리즈는 단순히 만화를 영화화한 블럭버스터 영화의 단순한 질감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는 영화다.
이런 성과를 거두게한 일등 공신은 역시 감독인 브라이언 싱어. 1편을 맡을때 사람들의 의구심 어린 눈초리는 이제 눈녹듯 사라졌고, 그는 많지 않은 작품으로 헐리웃 최고의 감독 대접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계약관계상 모든 배우들이 다 출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3편의 메가폰을 놓고 [수퍼맨 리턴즈]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은 황당하게도 [수퍼맨 리턴즈]의 감독을 맡기로 했던 브랫 라트너.
브랫 라트너...하면 성룡 주연의 [러시 아워] 시리즈를 만든 사람이다. 아아... 엑스멘 시리즈를 러시 아워의 감독이 만들다니...! 하지만 그는 [양들의 침묵]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레드 드래건]을 꽤나 말끔하게 만든 전력도 있다. 각본이 잘 받쳐준다면 3편이라고 기대 못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말부터 찔끔찔끔 공개되었던 예고편의 질감도 썩 좋았고.
지난주 미국서 개봉한 3편 [엑스맨: 최후의 전쟁]은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었다. 개봉날 수입 역대 4위. 평론가들의 평은 분분한 편이지만, 혹평을 한 쪽도 일부의 아쉬움을 토로한 정도지 작심한 혹평 또한 아니다. 로저 이버트처럼 영향력 있는 평론가는 주저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상태고. 적어도 1차적 반응으로 라트너는 성공한 셈이다.
이제 다다음주면 한국에서도 이 영화를 볼 수 있다. '3편'에 대한 기대는 일전에 블로그에 포스팅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보다도 더 하다. 그것은 '엑스멘' 시리즈에 나오는 돌연변이들이 '미션 임파서블'의 이던 헌트처럼 예정된 승리를 향해 달려가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승리할 지라도 언제나 깊은 암운을 안고 가는 아웃 사이더들이다. 게다가 2편의 개운치 않은 언해피 엔딩은 분명 3편에서 펼쳐질 전운의 변주를 미리 한모금 마시고 있는 상태다.
"에이.. 배트맨, 수퍼맨같은 영화 유치해"라고 생각되는 분들이 있다면 꼭 한번 다시 DVD로 감상해 보시길. 영화의 돌연변이들이 보여주는 화려한 초능력의 장기자랑이 아닌... 차별받는 자들의 아픔에 대한 이해로 그들을 바라보라.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강철 손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튀어나올때 뜯겨지는 살 때문에 매번 통증을 느끼는 울버린, 다른 이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과도 접촉할 수 없는 로그, 강력한 파괴 광선을 눈에서 내뿜지만 그것 때문에 늘 루비 선글래스를 껴야하는 사이클롭스.... 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엑스멘] 시리즈는 분명 다른 영화로 보일 것이다.
... 해서... 졸업학기때 '영화와 사회학'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교수도 의외의 영화에서 좋은 발견을 했다고 칭찬했었고. 잇힝~~ ^^;